▲ 손영민/꿈의 바닷길로 떠나는 거제도 여행 저자·칼럼니스트

나는 해만 떨어지면 술 생각이 난다. 특히 여행 중에는 그 증상이 더 심해진다. 낮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저녁만 되면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삼겹살을 구워 소주 한잔을 걸쳐도 좋고 대구포를 찢으며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도 좋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포장마차에서 꽁치 한두 마리 구워 놓고 소주잔을 비워도 좋다 중국집으로 발걸음이 닿으면 오향장육에 이과두주 한 잔을 시키고 또 레스토랑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스테이크 한 덩어리 미디엄으로 구워서 적포도주 한잔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고 일식집이라면 정종 한잔에 참치 회 한두 점도 잘 어울린다.

지난2일, 보수동 헌 책방거리로 갔다가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와 먹자골목을 구경하고 부산국제영화제 축제가 펼쳐지는 남포동 BIFF광장 야외무대를 거쳐 바로 이곳 자갈치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산자갈치시장은 갈치시장이 아니다. 과거의 이곳은 자갈밭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자갈치시장’이다.

자갈치 수산물시장 에는 생선 횟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싱싱한 생선회를 싼값으로 손님 바로 앞에서 장만해 줌으로서 찾는 사람들이 입맛을 잔뜩 당기게 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갈치 시장 노점상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산물거리 서쪽에는 생선을 파는 판때기 장수 아주머니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앉아 있다.

또 수산물거리 동쪽에서는 꿈틀거리는 꼼장어 껍데기를 파 껍질 벗기듯이 이골 난 솜씨로 벗겨져서 고추장을 주로 하는 양념에 버무려 번철에 구워 파는 판때기장수 아주머니들, 삶은 고래 고기를 그 자리에서 썰어 내주는 판때기장수 아주머니들, 미역이나 톳나물과 청각을 파는 판때기장수 아주머니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갈치시장 쪽에 석양이 붉게 물들 때 나그네는 더욱 외로워진다. 남포동전철역으로 돌아가다가 포장마차 하나를 발견했다. ‘원조 고래고기집’ 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이다. 안을 들여다보니 생맥주라고 쓰인 메뉴판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포장마차와 달리 원조 고래고기 집에는 전국각지에서 만든 소주와 민속막걸리가 진열되어 있고 스탠드바가 있다. 바를 사이에 두고 이 포장마차 주인인 듯 한 사내와 또 한 사내가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생맥주 한잔과 대구포를 시켰다. 술잔을 앞에 두고도 해가 떨어지니 왠지 슬퍼진다. 부산공동어시장 언덕 쪽을 바라본다. 거기도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택시들이 전조등을 켜고 바쁘게 오르내린다.

한국전쟁 최후의 보류였던 부산은 전국각지에서 피란민들이 내려와 어려운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곳 자갈치시장은 먹을 것이 없던 피란민들에게 부산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꼼장어는 허기를 면하고 영양을 얻을 수 있는 값싸고 좋은 음식거리였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생맥주를 마시는데 바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한 사내가 흘긋 쳐다본다.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피부가 검고 우락부락한 인상이다. 맥주잔을 거의 다 비웠을 즈음 그가 함께 술을 마시자는 손짓을 했다.

“누구지? 나를 아는 사람도 아닐 텐데…….”잠깐 망설였지만 혼자 마시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옆자리에 앉자 그가 유리컵에 소주잔을 가득 부어 주었다. 그러자 술집주인이 고래 고기 한 접시를 꺼내 내 앞에 내 놓았다.

술집 주인은 구레나룻을 길렀는데 앞머리가 살짝 벗겨진 대머리 이었다. 마치 허먼 멜밀이 지은 소설 ‘백경’에 나오는 에이헙 선장을 닮았다. 술을 권한 그 사나이가 나도 장승포항으로 내려온 피란민 출신이라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자신은 장 씨 성을 가졌는데 부두에서 하역노동을 하고 있으며 흥남 출신으로 흥남철수 난리 통에 어머니 등에 업혀 메르디스 빅토리아 호를 타고 장승포항을 건너왔다고 한다. 포장마차 주인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한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그는 어깻죽지를 주먹으로 탕탕 내리쳤다. 고된 노역 때문에 근육통이 생긴 모양이었다. 술집 주인은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고개를 끄떡거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술을 따라 주었다. 포장마차 안에는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소주를 따라 주었다. 우리는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비웠다. 취기가 오르는 데도 자꾸 슬퍼지기만 한다. 볼일을 보기 위해 일어서는데 취기 때문에 몸이 비틀거렸다. 자리에 돌아오니 그가 굵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국제시장’ 영화 속 주인공과 빼닮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64년 전, 그는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을 구출해준 장승포 사람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와 나는 소주잔을 다 비웠다. 술값을 내려고 하니 그가 한사코 말렸다. 이 술은 자기 술이니까 마셔도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듯 밤10시가 되었다.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둠속에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대고 읊조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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