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우수 경칩이 다 지나도 꽃샘추위는 기세를 부리며 사람들의 봄 기다림을 더욱 부채질한다. 예전에 선조들은 이 무렵 봄을 기다리다 못해 실낱같은 봄기색이라도 찾아 나서곤 했다. 눈 덮인 심산유곡으로 매향을 쫓아 설중매(雪中梅)를 찾아가는 ‘탐사’ 행각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신장(149~·1554)이 그린 탐매도 를 보자.

한 처사가 이른 아침 시동을 데리고 그윽한 향기를 쫓아 다리를 건넌다. 계곡 저편 한 그루 고목에 송알송알 게눈처럼 맺힌 매화 꽃망울들이 막 터지려는 순간이다. 그 매향 세례 속에 빨려 들어 한 잔술을 기울일 참인데 잠이 덜 깬 시동이 흥을 알 리 없다.

꽃 봉우리는 벌어지는데 술병은 저 뒤에 느림보이고, 자연의 덕성을 알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느낄 줄 아는 선조들은 이처럼 눈 속에 매화를 찾아다니고 그것을 그림으로 즐겨 그리곤 했다.

요즘 서양에서 들어온 향수제품이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이른 봄 눈 속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매화 향기만큼 기품 높은 것이 있을까. 눈을 이고 피는 꽃도 청순하고 가상하거니와 향기마저 있는 듯 없는 듯 애간장을 태우며 풍기니, 매화야말로 황량한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 서광과도 같은 것이다.

거제시일운면 옛 구조라 초등학교(폐교)에 들어서자마자 대한민국에 가장 먼저 핀다는 매화가 만발하여 세상을 매향으로 제압한다. 구조라 마을 어귀에 춘당이라고 불리는 가파른 곳에 ‘봄을 맞이하는 자리, 봄이 머문 자리’가 이른 봄을 띄우는 매화나무와 잘 어울린다고 해서 ‘춘당매(春堂梅)’라고 붙여진 매화나무는 이 학교 주변에 5그루가 있는데 수령이 약 120년에서 150년이나 된 그들과의 만남은 낯선 설렘 그 자체였다.

꽃나무 수는 많지 않지만 워낙 풀과 나무가 메마르고 꽃이 없는 시기이기에 이들이 피워낸 매화는 학교 안 밖 뿐만 아니라 먼 길가까지 바람결에 매향을 실어내 그 길을 지나는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봄이로되 봄이 아닌 이 무렵에 매화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꽃을 피우고 향기를 흩날리는데 그치지 않고 연분홍 색깔로 자태마저 곱게 가꿔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닷가에 오뚝 나타나니 지나가는 이들이 탄복을 하며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조라 초등학교에 피는 춘당매 중 홍매화 1그루는 故 이 봉래 교장선생님이 ‘공고지’ 수목원 강 영식대표로 부터 기증받아 심은 토종이란다. 토종 홍매화는 어떤 매화보다도 일찍 피는 게 특징이다. 소한 때쯤 피기 시작해 입춘 때 만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꽃들이 없을 때 향기가 바람에 날리니 매향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군자중의 군자다.

이곳의 남쪽으로는 또 하나의 명승지, 구조라 항이 있다. 구조라 항은 북병 산이 남으로 내려와서 오른쪽으로는 망치 수산을 휘감고 왼쪽은 와현 예구를 돌아 쥐이끝 등대에서 멈춰 섰다. 구조라의 정신적인 지주인 해안선 동쪽 끝은 수정봉이 솟구쳐 있는데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진 마을골목을 지나 한여름에도 서늘해 온갖 무서운 이야기가 댓잎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대나무 숲을 따라 올라가면 구조라성에 다다른다.

이성은 지금 여행객들의 휴식공간이 되었지만 무성한 나무의 세월만큼이나 우여곡절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04년(선조 37)에 옥포진지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왼쪽으로 구조라 해수욕장백사장, 오른쪽으로 구조라 항과 바쁘게 오가는 유람선과 고깃배와 조화를 이룬다.

구조라 항 주위에는 해금강을 비롯하여 내도, 외도 그리고 윤돌도 등 아름다운 관광지가 있고, 구조라 해수욕장과 와현모래숲 해변, 망치몽돌해수욕장 등이 어우러져 있다. 볼수록 아름답고 느낄수록 아름다운 곳이 장승포항을 둘러싼 공간이다. 설레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해수욕장 남서쪽에 자리한 전망대에 앉아 그 여운을 즐기는 것도 좋다.

옛 구조라 성에서 본 작은 섬인 윤돌도. 이곳은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 해수욕장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1Km2 가량의 작은 섬이다. 봄부터 가을 까지는 아침안개가 많이 끼는 곳이기 때문에 안개가 포구를 감싸고 섬의 머리만 내 놓고 있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다리가 없어서 건너가지 못하고 애태우는 노모를 위하여 아들 삼형제가 놓아주었다는 징검다리는 지금은 간곳이 없다. 전설의 뒤안길에 숨어버린 징검다리. 그 효자 섬에는 효자비석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후세사람들에게 효자의 교훈을 남겨준 효자섬. 바닷물이 나면 섬의 꼬리가 육지로 이어져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련히 드러난다. 태풍과 파도에도 지워지지 않는 징금 다리길. 효자의 지극한 마음이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물이 갈라지고 밑바닥이 드러나는 신비로운 바닷길이 열리면 나도 모세가 되어 윤돌 섬으로 걷고 싶다.

@여행정보
-홍매화로 담근 김치-
매화에는 홍매화, 백매화, 청매화, 황매화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꽃이 피는 홍매화는 그 열매도 개성이 다르다. 홍매 실은 백매실과는 달리 끄트머리가 뾰쪽하고 살과 씨앗 끄트머리가 붉은 기운을 띤다. 크기는 다른 매실보다 작고 열리는 수도 적다.

▲ 글· 손 영민/꿈의 바닷길로 떠나는 거제도 여행 저자·칼럼니스트

구조라 주민들은 해마다 홍매 실을 따서 매실김치를 담근다. 매실을 그늘에 말린 뒤 다시 소금에 넣었다 말렸다 하면서 매실의 수분이 줄어들 때까지 며칠간 절인다. 다시 소금을 쳐서 보통김치처럼 담그는데 이때 더덕을 함께 버무려 넣는다.

이렇게 담근 매실김치는 일본 것(우매보시)과는 달리 향이 더 진해서 매실김치의 고유한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홍매 실 김치는 향기가 더욱 진하고 육질이 단단하여 매실김치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유람선사 안내-
구조라 유람선터미널/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 97-11
전화 055-681-1188
내도 유람선 터미널/ 경남 거제시 일운면 거제대로 2752
전화 055-632-3532

글· 손 영민/꿈의 바닷길로 떠나는 거제도 여행 저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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